한성의 도성주변에는 산성으로서 북한산성, 남한산성을 구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토록 하였고 수도와 지리적으로 밀접하여 수도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개성, 강화, 화성, 광주의 사도를 유수부(留守府)로하여 중히 여기고 성곽과 관아를 정비․정돈
하였다.
지방팔도의 감영이 있는 곳의 읍성에는 관찰사를 배치하고 객사를 중심으로 하는 가로망과 토지이용계획을 수립하였다. 객사는
왕의 위패가 안치된 곳으로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하는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였고 대개 중앙에 배치된 곳으로 동서남북의 문으로
뻗어 가로는 십자형, T자형, 삼각형, 불규칙형 등의 가로망으로 구성되고 성곽 안(넓이는 전주의 경우 18만평정도)에 각종 관아건물과 일부
민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취락이나 읍성은 멀리는 고려조부터 형성되어 조선조에 와서야 정비된 경우가 많은 데 비하여 한성은
계획된 도성이었고 조선조 말 1796년에 낙성(落成)된 수원성곽은 계획적인 성도건설로 대표적인 곳이다. 수원성은 1794년 동서양의
축성법을 참고하여 근대적 장비까지 동원되어 조영(造營)된 실학사상의 표본적
본문내용 개경을 버리고 신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하여
천도를 계획한다. 처음에 한양(서울)에 천도를 지시하였으나 다시 팔도방백에게 도읍터를 물색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정당문학사(前政堂文學士)
권중화가 계룡산을 천거 1393년 신도 조영에 착수하였다가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반대로 중지한 후 모악산(서을 신촌일대)을 후보지로 정하였으나
다시 1394년에 무학대사의 권고에 따라 한양(서울)을 적지로 선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圖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국도건설에
들어갔다. 1398년 정종원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일시 옛 도읍지 개경으로 옮겼다가 1405년 한양으로 이도하여 조선조 500년의 도읍지가
되었다. 1394년 신도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판문하사(判門下事) 권중하,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 등을 명하고 청